펠로우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는 한 작가가 눈 덮인 외딴 풍경 속으로 이끌려 들어가며, 개인의 기억과 역사적 폭력, 그리고 위태로운 인간 관계가 교차하는 지점을 따라가는 사색적인 소설이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특히 국가가 가한 폭력이 어떻게 신체와 관계, 그리고 땅 자체에까지 지속되는지를 그리는 동시에, 제주 4.3 사건과 희생자들을 기리며 돌봄과 애도, 그리고 고요한 인내의 행위에 주목한다.

성근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내가 서 있는 벌판의 한쪽 끝은 야트막한 산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등성이에서부터 이편 아래쪽까지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들이 심겨 있었다. 여러 연령대의 사람들처럼 조금씩 다른 키에, 철길 침목 정도의 굵기를 가진 나무들이었다. 하지만 침목처럼 곧지 않고 조금씩 기울거나 휘어 있어서, 마치 수천 명의 남녀들과 야윈 아이들이 어깨를 웅크린 채 눈을 맞고 있는 것 같았다.

묘지가 여기 있었나, 나는 생각했다. 이 나무들이 다 묘비인가.

우듬지가 잘린 단면마다 소금 결정 같은 눈송이들이 내려앉은 검은 나무들과 그 뒤로 엎드린 봉분들 사이를 나는 걸었다. 문득 발을 멈춘 것은 어느 순간부터 운동화 아래로 자작자작 물이 밟혔기 때문이었다. 이상하다, 생각하는데 어느 틈에 발등까지 물이 차올랐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믿을 수 없었다. 지평선인 줄 알았던 벌판의 끝은 바다였다. 지금 밀물이 밀려오는 거다.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물었다. 왜 이런 데다 무덤을 쓴거야?

점점 빠르게 바다가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날마다 이렇게 밀물이 들었다 나가고 있었던 건가? 아래쪽 무덤들은 봉분만 남고 뼈들이 쓸려가버린 것 아닌가?

시간이 없었다. 이미 물에 잠긴 무덤들은 어쩔 수 없더라도, 위쪽에 묻힌 뼈들을 옮겨야 했다. 바다가 더 들어오기 전에, 바로 지금. 하지만 어떻게? 아무도 없는데. 나한텐 삽도 없는데. 이 많은 무덤들을 다 어떻게. 어쩔 줄 모르는 채 검은 나무들 사이를, 어느새 무릎까지 차오른 물을 가르며 달렸다.

눈을 뜨자 아직 동이 트지 않았다. 눈 내리는 벌판도, 검은 나무들도, 밀려드는 바다도 없는 어두운 방의 창문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다시 그 도시에 대한 꿈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차가운 손바닥으로 두 눈을 덮고서 더 누워 있었다.

  •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은 한국 현대사의 폭력과 인간 존엄의 취약성을 급진적인 명료함과 절제된 언어로 다루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아왔다. 국가 폭력, 권위주의, 집단적 애도의 여파가 개인의 삶에 어떻게 스며드는지를 섬세하게 추적 해 온 그의 작업은 한국의 민주주의 및 주권에 대한 질문과 긴밀히 맞닿아 있으며, 신체와 기억, 양심을 정치적 역사가 살아지고 경합되는 장소로 드러낸다.

연락처
제61회 베니스비엔날레 국제미술전 한국관
관람자 정보
전시 기간: 2026년 5월 9일 – 11월 22일
관람 시간: 10:00 – 1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