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계엄의 밤
24.12.03 - 24.12.04
계엄의 밤. 평일은 보통 늦은 시간까지 사진 수업이 이어진다. 여대 시위, 알코올 중독, 친구의 죽음. 모두 각자의 최전방에 서서 사진을 찍고 있다. 한 친구가 광주 5.18 시위대 두 번째 줄에 계셨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친구를 무참하게 잃은 아버지, 말을 아끼시는 아버지라고. 광주에서 만나 뵌 분이 오월이 되면 피부에 피멍이 올라온다고 말씀하신 적 있다. 꿈에서도 죽은 이들의 관짝이 활짝 열린다고. 그런 장면들을 둥글리다가 밥을 먹었다. 핸드폰이 꺼져있었는데 같이 밥을 먹던 분이 계엄이라고 말해주었다. 계엄? 계엄. 계엄. 이것이 다시 깨어날 수 있는 단어였던가. 카메라를 챙겨 가서 사진을 찍었다. 망령을 보고 왔다고 생각한다.
광화문, 탄핵안 가결
24.12.14
괴로운 시절과 상냥한 시절이 함께 온다는 것이 나를 아주 미쳐버리게, 미쳐버리게 만드는 것 같았다. 절망은 빠르고 희망은 넓게 드리우고. 연말은 될지 안 될지 모르는 것들의 발표를 기다리며 몇 군데 여행이나 다니기를 소망했는데. 시간은, 시간의 장력은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알지 않았나. 않았을까? 수업 시작 직전에 수업 장소에 도착한 날이 있는데 학생들이 일찍일찍 다니라고 성을 냈다. 그게 웃기고 기운차리는 데에 도움이 됐다. 수업 덕에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집회, 각자가 쥐고 사는 과거나 죽은 자에 대해 알아간다. 최승자의 시가 입에 계속 맴돈다. (나는너를모른다/나는너를모른다 / (…)/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모른다. 부끄럽다. 육체. 육안. 길의 시간이나 겨울 바람을. 부끄러움을 빌미로 눈이 선연해지기를 원한다.
남태령, 전봉준 투쟁단과 서서
24.12.21 - 24.12.22
이른 나이에 사학비리 고발자, 사진계 내 성폭력 고발자로 체제에 불응하고 싸우면서 몹시 지쳤고 내게 들이닥치는 사회의 분위기에 실망했다. 제대로 싸우기나 했던 걸까. 떼를 쓴 걸까. 때론 그 시절이 깊은 망각이나 패배의 경험 같아서 까먹으려고 부단히 애쓰며 지냈다. 같이 싸워준 사람들의 둥근 얼굴이 몇 달 전에 겨우 생각나서 집에서 소리 없이 울었다. 사진계 내 성폭력 감시자 연대. 그런 게 있었지, 참. 그 명단에는 아빠의 이름도 들어가 있었다.
몸집을 키우거나 나이가 들면 좀 나을까. 이길까. 돌아볼 틈을 주지 않고 일을 하고 작업을 하고. 어느 날은 헤프게, 또 어느 날은 어떤 의제에 고개를 휙 돌리며 지냈다. 작업들이 유순해질 때 참 편하기도 했다. 싸우면 만신창이가 되니까. 침대에 멀거니 누워있기. 여전히 그때와 별다를 바 없이 누워있을 때가 많다. 울적한 나를 혼쭐내던 선생님은 세월호에서 학생들을 돕다가 돌아가셨다. 좋은 어른이 되어서 찾아뵈어야지, 했던 다짐은 조문이 되었다. 3년째 이태원에 살고 있다. 동료 시민들을 무참할 정도로 잃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 나라를 사랑하지? 그런데 또 친구들과 한참 놀고 뭉근하게 바라보는 노을, 한강 따위는 너무 아름다워서. 이곳이 지독히 재밌어서. 제대로 싸울 줄도 모르고 제때 떠날 줄도 모르고 미련을 떨며 지냈다.
이런 날 퍽퍽 때린 건 사진과 동료들이었다. 시위 덕후, 사람 타는 냄새를 맡았던 선배. 화염병 만드는 법을 기가 막히게 아는. 살수차에 카메라가 젖는 게 익숙해서 카메라를 늘 두 대씩 몸에 붙이고 다니는 동료들. 비교적 민주적인 대통령의 임기 때도 농민이 죽었던 거 알아? 동료가 물었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는 건 어째서 이렇게까지 부끄러운 걸까. 의심과 의문도 다른 방식의 연대라는 걸 그때 알았다. 계엄이 터졌을 때, 그냥 일단 국회에 갔다. 연락을 나누지 않았는데 동료들이 거기에 있었다.
남태령. 트랙터의 깨진 유리가 계속 맘에 걸려 그곳으로 갔다. 파들파들 떠는 여자들 사이에서 나도 떨었다. 일행 없이 온 내게 방한 용품들이 들이닥쳤다. 소녀들이 ‘투쟁으로 인사드립니다. 투쟁!’ 외쳤다. 읽지 않을 발언문을 고쳐 써보기도 했다. 차가운 아스팔트에서 서서히 깨어나는 느낌이 났다. 한진중공업 김진숙 복직투쟁 도보행진을 함께 하고 김진숙 선생님께 내가 쓴 책을 드린 일이 있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활동가 미류님이 46일간 이어온 단식 투쟁을 마칠 때 선생님은 내 책을 인용하셨다. ‘내 피까지 흘린 사람아, 우리 봄이요. 우리 이제 봄이요.’ 싸움 이후 울며불며 만든 개인전. 그 전시를 보고 활동가 혜원님은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에 대해 얘기해도 부끄럽지 않은 거구나, 느끼셨다고 엽서를 보내주셨다. 나는 광장에 있었구나. 계속 있어야 했구나. 협소해지지 말아야지. 길에 있을 때면 많은 사람들이 떠오른다. 뼈가 아린 추위. 연대가 흉곽에 정확하게 새겨지는 경험. 내가 치사해질 때, 이 경험이 내 머리채를 사정없이 낚아채겠구나.
남태령 이후
24.12.22
남태령에서 밤을 새우고 돌아와서 사진을 한 장을 꼭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피부와 입술이 부르터 추레한 얼굴. 현상된 사진 속 내 모습이 풀죽은 강아지 같아 웃음이 다 났다. 아침은 지워버리기 십상이었는데 요즘따라 아침 녘을 제법 본다. 아침 해 뜰 때랑 노을 질 때 색온도가 똑같지 참, 그랬다. 아침 녘에 삶의 아지랑이가 있는 듯하다.
혜화, 전국장애인철폐연대와 서서
25.1.17
할아버지를 요양원에 데려다주고 (혹은 놓아두고, 넣어두고. 당최 뭐가 맞는지) 온 주에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시위에 갔다. 할아버지는 거동이 어려워진 순간부터 자신을 쓸모없는 사람, 정물로 취급했다. 박경석 대표가 자신을 에워싼 사람들에게 당신들도 쓸모없어진 느낌을 느낄 때가 분명히 올 거라고 말했다. 쓸모. 역사에서 부대끼는 광경을 보다가 퇴거 없이 역을 빠져나왔다. 경찰과 시위대가 줄지어 가는 길목. 찜기에서 연기가 폴폴 피어올랐다. 과거가, 옛 도시가, 구전과 침묵이 우르르. 난 그 기체를 봐야 했고 누군가에게 설명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