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과 여성]은 싸워 패배하고, 그들이 외치던 것은 그들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도래하지만, 도래한 것은 그들이 뜻하던 것이
아니며, 다른 남성[과 여성]은 또 다른 이름으로 그들이 뜻한
것을 위해 싸워야 한다.
윌리엄 모리스, 『존 볼의 꿈』(1887)
최빛나 예술감독이 기획한 제61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은 ‘해방공간’의 기념비로 설계되었다.1 최빛나가 말하는 ‘해방공간’은 한국 역사 속 특정한 시기를 지시하기도, 오늘날 해방 및 민족성의 본질에 관한 보다 광범위한 질문을 가리키기도 한다. ‘해방공간’이라는 용어는 한국 사학자 및 문학 비평가들이 일본 식민 지배에서 해방된 1945년 8월부터 대한민국이 건국된 1948년 혹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사이의 시기를 독특한 미학적·담론적 영역 및 공간으로 재-개념화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되었다. 1970년대 후반에 시작된, 반공주의와 냉전이라는 지배적 틀을 걷어내고 한국사를 재평가하려는 더 큰 흐름의 일환으로서, 해방공간은 해방 후의 시기를 자생적 민족 주체성의 표현으로 재해석했다. 이는 국가 건설을 위한 강렬한 열망과 그러한 노력이 전개된 유동적인 정치·사회적 조건을 포착하기 위함이었다. 해방공간은 단순한 시간적 구분이 아닌, 한국적 근대성과 탈식민성이 상충하는 가운데 정치적 세력들이 맞부딪히는 역동적 공간을 의미하게 되었다.2
많은 이들이 알다시피, 이 탈식민적 해방의 순간이 품고 있던 초기 가능성들은 미군정의 점령, 영구적 분단, 그리고 냉전 논리와 외세의 주도로 치러진 내전에 의해 비극적으로 차단되거나 ‘균열’되고 말았다.3 그러나 해방공간은 자체적인 주권성과 시간성, 계승 방식을 가지고 있으며, 해방공간 혹은 해방공간의 일부 요소들은 내가 유토피아적 주변부라 부른 곳에 자리해 있다.4 본 짧은 글에서 나는 1948년 여순사건이라는 불협화음의 시점을 통해 이 역사적 순간에 접근하고자 한다. 이 시점은 1948년 세계 질서의 변동, 군사주의와 군인의 역할, 그리고 지속되는 해방의 과업에 관한 오늘날의 몇 가지 주요한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이 글은 역사적 세부 사항과 더 큰 복잡성을 간신히 건드릴 뿐 매우 불완전하며 《해방공간: 요새와 둥지》라는 아상블라주 안에서, 그리고 그 곁에서 울려 퍼지는 일개 작은 목소리에 불과하다.
마지막 위대한 항쟁
1948년 10월 19일, 지창수 상사와 김지회 중위, 홍순석 중위를 필두로 여수에 주둔하던 제14연대 소속 약 40명의 병사들은 출동 명령이 떨어지자 제주토벌출동거부병사위원회를 자처했다. 신속히 조직을 정비한 이들은 새로 창설된 2,500명 규모의 젊은 연대원 중 약 3분의 2를 설득하여 제주 파병 명령을 거부하는 대열에 합류시켰다. 제주에서는 신임 대통령 이승만이 초토화 진압 작전을 개시한 상태였다. 이는 이승만 정권부터 분단, 미국의 사실상의 한국 점령, 그리고 그 점령과 분단이 강요한 정치경제적 질서까지, 이 모든 것에 맞서 싸우는 제주의 저항 세력을 겨냥한 것이었다.5이들은 성명문을 발표했는데, (그 출처에 대해서는 아직도 이견이 있으나) 성명문은 ‘동포 학살’을 거부하는 병사들의 입장을 밝히며 다음의 두 가지 핵심 사항을 강조한다: ‘동족상잔 결사 반대’ 그리고 ‘미군 즉각 철수.’6
봉기군 병사들은 세 개 부대로 나뉘어 서로 다른 경로로 미평역에 향했고, 그곳에서 순천행 북행 열차에 올라탔다. 일부는 여수에 남아 대거 합류한 시민들과 함께 여수를 장악하고 이어 순천, 광양, 보성, 구례, 곡성을 차례로 점령했다. 사람들은 봉기군의 도착을 사전에 알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갖춰진 상태였다. 즉 ‘대비’되어 있었는데, 여기서 대비란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공동체의 일상적 삶의 실천 속에 체화되고 실현되어 있는 정치적 각성을 뜻한다. 이는 지식, 협력, 상호 지원의 형태로 존재하되, 아직 가시적이거나 명시적인 정치적 주체성으로 조직되지 않은 것이다. 말하자면 대비란 오거나 오지 않을 수도 있는 집단적 동원의 순간을 향한 은밀하고, 때로는 고의적으로 비밀스러운, 꾸준한 대기 상태다. 대비가 좀처럼 선언되지 않는 것은, 선언하는 순간 그것이 기피해야 할 불법적 행위로 전락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더러는 자신이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아직)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7
이 대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 강조할 필요가 있다. 모든 정황상 일주일도 채 안 되는 기간에 계획되었으며 연대 내 남조선노동당원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외부 세력과의 조율은 분명코 없었던, 이 병사들의 봉기는 당시 신생 한국 해군의 일부 대원들까지 참여한 것으로 알려진 1946년 9월 대구 총파업 진압과 10월 계엄령 선포 이후 표면상 완전히 분쇄된 것처럼 보이던 민중적 저항과 민중적 자치 형태, 즉 탈식민 민족국가의 원형인 인민위원회를 다시 불러일으켰다.8 해방공간을 닫으려는 모든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제주와 전라남도의 수많은 사람들이 투표를 거부하는 등 석연찮았던 8월 선거에도 불구하고, 해방공간은 1948년 늦가을까지 여전히 열려 있었으며 자신만의 시간에, 자신만의 방식métier으로 고요히 또 다른 기회를 대비하고 있었다. 그 기회가 찾아오자, 병사들은 통상적인 패턴처럼 단순히 명령을 거부하거나 도주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들의 불복종은 권력 탈취나 군사 지배 수립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외려 그들은 자신들이 부당하고 불가능한 명령이라 여긴 것을 거부하고, 시민 세력이 더 넓은 사회정치적 목표를 추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여수 시내 한복판에서 한 차례 혹은 그 이상의 인민대회가 열렸으며, 이 자리에서 뛰어난 언변의 지창수 상사가 연설을 했다고 믿는 이들도 있다. 여수인민보가 발행되었고, 인민위원회는 여성동맹, 노동조합, 학생연합의 동지들과 함께 활동에 돌입했다. 이들은 다음의 6개항 결의문을 발표했는데, 이는 반식민 독립운동이 본래 선포한 민족국가인 조선인민공화국이 1945년 제기했으나 끝내 실현되지 못한 요구들을 되풀이한 것이었다: 토지 개혁, 친일 지주의 토지 몰수 및 빈농 재분배, 노동권, 자유로운 언론·집회 및 재식민화 반대를 위한 정치적 권리, 여성 평등권, 친일파 및 친일 경찰 처벌. 1948년 10월에는 새로운 항목을 추가할 필요가 생겼다: 이승만이 선포한 신생 국가 거부와 ‘유일한 통일 민족 정부’인 조선인민공화국에 대한 지지였다.9
10월 22일까지 여수인민위원회는 시와 군의 모든 행정 업무를 장악했다. 응징과 변혁을 병행하며 경찰서를 접수하고, 은행 계좌를 동결하고, 사업체를 몰수했다. 식량 배급소가 다시 문을 열었고, 쌀(과 신발)이 무상으로 배급되었으며, 노동자에게는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었고, 노동자 자치위원회가 몰수된 사업체를 운영했다. 구례, 순천을 비롯하여 병사들이 징집된 인근 지역 공동체에서도 동일한 장면이 펼쳐졌다.
병사들의 봉기와 그것이 촉발한 민중의 움직임은 빠르게 진압되었다. 미국은 고문단과 종군기자들을 파견하고 광주를 사령부로 한 한국군의 반격을 지원했다. 10월 22일 여수와 순천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정부군이 순천으로 진격하여 당일 저녁 탈환했으며, 10월 27일에는 여수를 재탈환하면서 시내 상당 부분을 불태워버렸다. 일주일간의 자치 실험은 막을 내렸다. 잔존 봉기군 천여 명은 광양의 백운산을 거쳐 순천의 염전을 넘고 섬진강을 따라 도주했다. 이내 구례를 통해 지리산에 도착한 이들은 그곳에서 규합 중이던 소규모 신생 빨치산 부대에 합류했다. 이로써 민족해방과 통일을 가치로 내 건 실질적인 빨치산 군대가 탄생한 셈이었다. 시가전에서 죽지 않았거나 산으로 도주하지 못한 병사들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즉시 처형되거나, 대구교도소로 이송되어 1950년 한국전쟁이 공식적으로 발발한 후 즉결 군사 재판에 회부되거나 처형되었다.
봉기 진압 과정에서 수천 명이 즉결 처형되거나 투옥되었다.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평등주의자, 농민, 페미니스트, 전통적인 어머니들, 노동조합원, 교사, 고등학생 등, 다른 삶의 방식을 바라는 마음을 다소라도 품었을 법한 사람이면 누구든 예외는 없었다. 이 ‘누구’(혹은 ‘아무’)는 사실 다수였다. 미군 자체 조사에서도 확인 되었듯, 한국인의 압도적 다수는 자치적이고 평등하며 민주적인 사회를 원했다.10 그 열망을 말살하는 것이 이른바 모든 토벌 작전의 명백하고 노골적인 목표였으며, 수천 명이 그를 위해 살해되거나 삶을 영구적으로 짓밟혔다. 신생 한국군은 좌파, 반제국주의, 진보적 민족주의 성향의 인사를 숙청하는 한편 준-군사적 우익 단체를 모집하여 무장시켰다. 신문은 폐간되었고, 가담자 및 가담 혐의자의 가족에게는 연좌제라는 집단적 처벌이 부과되었다. 사건에 관한 기록, 그리고 병사들에 관한 기록은 말소되고 파기되어 날로 늘어가는 국가의 실종자 대열에 보태졌다.11 지리산과 한라산은 1955년까지 법적으로 ‘출입 금지’되기까지 했다. 1948년 12월에는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어 ‘반국가 행위’를 불법화하고 사형까지 허용했으며, 이로써 1987년까지 한국을 특징지었던 일련의 권위주의 정권과 군사독재의 통치 질서가 확립되었다. 개정을 거치긴 했지만, 국가보안법은 지금껏 단 한 번도 폐지되지 않았다.
Rebel soldiers arrested. 1948. Photograph by Carl Mydans.
해방회로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과 9월 8일 주한미군정의 수립 사이, 백지 상태의 자유로 가득 찬 3주가 있었다. 사람들은 다양한 감정을 안고, 빈약한 자원과 함께, 막 귀국하거나 감옥에서 풀려난 오합지졸의 민족해방 조직과 더불어, 긴긴 역사적 기억을 품은 채 해방공간에 들어섰다. 그리고 그 3주를 최대한 늘려나갔다. “농민들은 일본인 소유 농지를 점거했고, 노동자들은 공장을 장악했으며, 마을 사람들은 옛 식민지 경찰을 마을에서 몰아냈고, 여성들은 정치적·경제적 평등을 요구했다.”12 병사와 수병조차도 때로는 파업에 동참하고 잘못된 명령이라 여겨지는 것은 따르지 않았다. 1945년 그 온전한 자유의 3주와 1948년 늦가을 사이, 미국의 점증하는 억압 속에서도 1945년이 불러일으킨 해방의 열망은 한반도 전역에서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어나갔다. 코넬 장은 최근 이 시기를 한국의 ‘아시아의 봄’으로 묘사한 바 있다. 이 시기 기울인 엄청난 노력과 그 정신의 상당 부분이 재건과 새로운 국가 건설을 향해 있었기에, 우리는 이 시기를 남북전쟁 직후 미국 흑인들이 구축한 대안적 생활 기반, 즉 툴라니 데이비스Thulani Davis가 말하는 ‘해방회로emancipation circuit’라 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13
해방회로가 만들어진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는 대략 40년에 걸친 일제의 잔혹한 식민 지배 이후 사람들이 품었던 그 비범한 의지와 목적의식을 상상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식민 지배는 강제적 근대화를 수반했으며, 그 자체가 이미 깊이 위계화된 불평등한 사회인 ‘조선’ 위에 덧씌워진 것이었다. 조선은 1894년 패망의 길로 접어들면서야 비로소 세습 노비제를 폐지한 참이었다. 1945년 그토록 지치고 흩어진 상태에서 세계를 재창조하고 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것, 그리고 탈식민적 삶의 조건이 민중의 주도와 통제 아래 놓일 수 없음이 분명해져가던 1948년 말에 다시 한번, 비록 균열되고 혼란했을지라도 나라의 전체적 방향을 틀어쥐려 했던 것, 그 얼마나 대단한 회복력과 낙관주의를 요구하는 일이었던가.
잠깐의 시간 동안 전후/탈식민 재건의 사회·정치·경제적 조건이라는 물음의 답이 울려 퍼졌다. 그 답과 그것이 품은 비전은 미국의 비전과는 전혀 달랐다. 미국은 분단된 한국을 반공 투쟁의 전진 기지이자 자본주의-민주주의의 쇼케이스로 제시했으며, 그 야만적인 원시적 축적과 개발의 조건들은 언급조차 되지 않거나 묵살되었다. 그 답은 북쪽에 제시된 소련식 권위주의적 사회주의 계획경제와도 전혀 다른, 다른 무언가였다. 끊임없이 왜곡되고 비방 받아 온, 자신을 실현할 올바른 사회적 형태를 찾아 헤매던 다른 무언가.
다른 무언가는 새로운 것이었다. 그 형태와 성격에 있어 완전히 현대적인, 비참함과 예속 없는 진정한 탈식민적 삶에 대한 희망. 동시에 그것은 오랜 억압과 저항의 역사에 깊고도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1948년 인민위원회 행동 강령의 첫 번째 항목은 토지 개혁이었는데, 이는 150년이 넘도록 제기되어 온 요구로서 1894년 동학과 그 이전 농민봉기의 유령을 불러내는 것이었다. 마치 여수가 1980년 광주(5.18)와 2024년 서울(12.3) 사후 1948년이 가지게 될 의미의 일부, 하나의 잔재가 되듯이.
다른 무언가, 1948년 늦가을 여수에서 벌어진 그 사건은 전면전과 그로 인한 헤아릴 수 없는 파괴가 시작되기 전 마지막 위대한 항전이었다. 해방의 회로를 다시 작동시키려는 시도였으며 미국에게 주어진 두 번째 기회였으나, 그들은 이를 의도적으로 낭비했다.14 1948년 여순사건은 역사의 기로였다. 새로운 미국 군사 제국과 그 히스테릭하고 타협을 모르는 반공주의가 설정한 기로와는 다른, 자유와 민주주의의 다른 양식, 독립과 자치의 다른 국가적 구조가 가능했을지도 모르는 기로.
기로들
1948년 제주와 여수에서 일어난 일은 한국이 전쟁과 권위주의의 길로 접어들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 비극은, 비록 간접적으로나마, 1948년이 의미하는 보다 넓은 지정학적 질서와 맞닿아 있다. 여기에는 일본 제국의 완전한 패망, 사회주의·공산주의·민중민주주의의 모든 흐름을 뿌리 뽑으려 한 미국 군사 제국의 부상, 그리고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나크바Nakba 체제의 시작이 포함된다. 1948년 확고히 자리 잡은 전후 세계 질서가 변이하고, 무게 중심을 옮기고,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전환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는 지금, 1948년은 유령이자 예언으로서 다시 나타난다. 새로운 미국 제국의 부와 권력의 핵심이자, 한국·일본·독일이 중심 거점을 이루던 지정학적 구도의 토대였던 군사주의와 군사 전초 기지들은 오늘날 거대한 초국적 군사 안보 감금 기계로 변모했다. 이 기계는 영구적이고 해체 불가능한 것으로 당연시되며, 더 이상 과거의 이분법적 이데올로기에 얽매이지 않는다.15
오늘날 군사주의라는 긴박한 문제는 제14연대 봉기의 역사적 의미를 새삼 부각시킨다. 아주 넓은 의미에서의 탈영병, 즉 불복한 병사들의 역사는 길고도 초국적이다. 애초에 입대나 징집을 거부하는 이들, 군대라는 것 자체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간직하거나 몰래 속삭이는 이들, 내부에서 교묘히 전쟁을 방해할 방법을 찾는 이들, 전투 중이나 이후에 자리를 뜨는 이들, 적극적으로 명령을 거부하는 이들, 그리고 전쟁 자체에 반대하거나 자신들의 임무가 진압해야 할 바로 그 대의를 위해 정치적으로 조직하는 이들. 제1차 세계대전 병사들이 참호에 곧잘 남긴 낙서 ‘항명은 전쟁의 양심이다’에도 불구하고, 불복종 병사들의 대다수는 폭도나 파업자, 즉 집단적으로 조직된 반란군이 아니었다. 그런 병사들의 역사가 영감을 준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징집병들부터 세포이 용병, 필리핀-미국 전쟁의 데이비드 페이건과 흑인 ‘그을린smoked’ 양키들, 킬 군항과 크론슈타트의 수병들, 140여 종의 지하 신문을 발행한 베트남전 미군 병사들, 이라크 참전 반전 용사들, 그리고 다코타-수 부족의 물 수호자들을 지원하고자 집결한 수천 명의 ‘스탠딩 록을 위한 참전 용사들’에 이르기까지. 비록 (어쩌면 3분의 1에 달할 수도 있는) 일부가 봉기와 그 뒤이은 혼란의 기회를 틈타 도망쳤을지라도, 나는 제14연대 봉기병들 역시 이 역사 안에 위치시키고자 한다. 달아나 숨거나, 탈출하여 고향에서 인민위원회 재건을 은밀히 돕거나, 봉기군 병사들을 숨겨 주고 먹을 것을 제공하거나, 드문 경우지만 반대편인 진압군에 합류했을지라도, 역사 속 이 젊은이들의 대담함과 그들의 정치적 동기 및 입장이 지닌 도덕적 깊이는 주목할 만하다.
역사의 기로는 언제나 그 자취에 흔적과 유산을,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남긴다. 여순사건은 국군 장병들이 양심에 어긋난다고 느끼는 명령을 거부하고 보다 정의롭고 평등한 질서를 위한 투쟁에 자신을 내맡길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는 어디서도 입 밖에 낼 수 없는 가능성일 뿐 아니라, 군대의 지휘통제 체계 전체가 봉쇄하도록 설계된 바로 그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4년 12월 3일 일부 장교와 병사들이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 선포에 공개적으로 혹은 하부정치적인 방식으로 저항하면서 이 가능성의 실마리가 포착되었다. 이들의 저항은 국회의 계엄 해제 결의를 가능하게 했고, 윤석열의 파면과 탄핵을 요구하는 대규모 민중 궐기를 촉발했다. 이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으로 이어진 2016-2017년 촛불 시위의 메아리, 그 자체였다.16 최근 선출된 이재명 대통령이 2025년 10월 19일 여순사건 77주년을 맞아 제14연대 병사들의 행동을 ‘부당한 명령에 맞선 항거’로 규정하며 전례 없는 공개 성명을 발표한 것은 아마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는 77년간 부정되고 유보되어 온 인정이었다.17
유토피아적 주변부에서
1948년 여순사건은 반복하여 모습을 드러내는 수많은 가능성의 순간들 중 하나였으며, 시간과 함께 축적되고 집적된 그 순간들은 우리의 현재를 맴돌며 일종의 유토피아적 주변부를 이룬다. 여순사건을 유토피아적 주변부에 위치시킴은, 여순사건을 역사적 해방공간이 권위주의적 자본주의와 분단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다른 모습으로 실현될 수 있었던 마지막 시도들 중 하나로 보는 것이다. 여순사건을 추동한 열망, 기대, 연대 등 그 대담한 노력을 끊임없이 지워지고 침묵당해야 할 처참한 실패로 보거나 국가의 치명적이고 무차별적인 행동에 대한 책임을 군인, 시민, 그리고 그 가족들에게 돌리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보다 긴 사회적 투쟁과 억압의 역사 속 한 순간으로 다루는 것이다. 여순사건 여수유족회 서장수 회장이 내게 말했듯, “여수가 없었다면 광주도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1894년이 없었다면 1919년도 없었을 것이고, 1919년이 없었다면 1946년도 없었을 것이고, 1946년이 없었다면 1948년도 없었을 것이고, 1948년이 없었다면 1980년이나 2024년도 없었을 것이며, 1980년이 없었다면 1987년도, 1987년이 없었다면 1997년도 없었을 것이다.18 날짜는 얼마든지 달리 쓸 수 있다.
해방공간 기념비는 우리를 통상적인 역사적 시기로 안내하기보다, 서장수 씨가 불러낸 더 긴 역사적 궤적으로 안내한다. 그 궤적은 유토피아적 주변부의 이음새를 따라 과거를 미래로, 미래를 다시 과거로 구부리며, 우리가 서 있는 유일한 자리인 현재에서 붙잡으려 하는 실들을 수렴하고 끊고 엮는다. 오늘날 우리의 현재는 군사적 침략과 팽창, 선제적이고 항구적인 전쟁, 학살, 벌거벗은 자본주의,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권위주의와 파시즘의 부상이 지배하고 있다. 형태와 위치를 맞물리며, 해방공간 기념비는 우리를 탈주선으로 안내한다. 그곳에서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것은 시간적으로 불연속적이고 비선형적인 역사기술historiography을 이루며, 미래가 과거를 바꿀 수 있듯 현재가 미래에 뒤처질 수 있고, 현재가 아직 따라잡지 못한 과거가 소환되어 대안으로서 현재를 맴돌 수 있다. 요새와 둥지로서, 해방공간 기념비는 우리를 존재할 수 있었던 역사적 대안들의 상실에 의해, 그리고 슬픔과 분노, 결코 말해지지 않을 침묵과 결코 아물지 않을 상처로 가득한 현재에 잃어버린 더 나은 미래들의 그림자가 스며드는 기묘한 시간성에 의해 유령에 씌고 비통함에 젖은 공간으로 안내한다. 마지막으로, 펠로우로서/펠로우십 안에서, 해방공간 기념비는 우리를 살아 숨쉬는 해방공간, 해방회로로 초대한다. 때로는 공개적으로, 때로는 숨어서, 때로는 무심한 듯 존재하며, 결코 완전히 열리거나 닫히지 않고, 우리가 대체로 통제하지 못하는 힘들에 의해 끊임없이 닫히고 열린다. 항상 다시 시작하며, 다른 무언가로 변해가고, 우리에게 필요한 삶의 형식을 만들고 살아내고 키워나가는 곳으로. 어서 오시라.
- 1 초청해 준 예술감독 최빛나에게 감사를 전한다. 연구 및 번역에 도움을 준 SOAS 런던대학교의 오윤화와 정소희, 여수에서의 초기 현지 접촉을 도와 준 5·18국제연구원 소속 전임연구원 유경남에게도 마찬가지로 감사를 전한다.
- 2 해당 시기의 의의나 현대적 중요성에 관한 방대한 역사 연구와 논쟁들이 존재하나 본고에서는 다루지 않았다. 이 분야를 정의한 초기 주요 학자로는 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과 서울대학교 교수 김윤식이 있다. 백낙청 편, 『해방전후사의 인식 1』(서울: 창작과 비평사, 1979). 백낙청 편, 『해방전후사의 인식 2』(서울, 창작과 비평사, 1985) 참조.
- 3 코넬 장, 『균열된 해방: 미군정 아래 한국』(하버드대학출판부, 2025).
- 4 에이버리 F. 고든, 『호손 아카이브: 유토피아적 주변부에서 온 편지들』(포드햄대학출판부, 2018).
- 5 1947년 3월부터 1954년 9월까지, 미국이 시작하고 주도한 근현대사에서 가장 폭력적인 반공·반사회주의·반좌파 진압 작전으로 약 3만 명이 살해되고 제주도 마을 3분의 1 이상이 파괴되었다. 제주 4·3 사건 및 학살에 대한 기억과 공적 인식은 2000년 첫 국가 진실규명위원회가 설립되기 전까지 반세기 이상 한국 정부에 의해 억압되었다. 당시 육지 사람들 중 일부가 제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 6 주철희, 『주철희의 여순항쟁 답사기 1』(흐름, 2021), 21-23쪽. 주철희, 『주철희의 여순항쟁 답사기 2』(흐름, 2022). 주철희,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 1948, 여순항쟁의 역사』(흐름, 2017), 126쪽 참조. 나를 포함하여 여순 사건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은 주철희 박사의 지칠 줄 모르는 면밀한 연구에 큰 빚을 지고 있다. 「애국 인민에게 호소함」은 1948년 10월 24일자 『여수인민보』에 게재된 것으로 전해지지만, 내가 대화를 나눈 사람들 중 한국어 원문을 실제로 본 이는 아무도 없다. 이 문건은 미군이 이를 소유함에 따라 다른 신문들에 의해 보도되었다. 한국 주재 미국 최고 대표이자 이후 초대 주한 미국 대사가 된 존 제임스 무초 가 입수하여 여순사건에 관한 보고서에서 영어로 옮겼고, 이후 연구자들이 그 영문판을 한국어로 재번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7 에이버리 F. 고든, 『호손 아카이브』중 |미국 노예제|대비|엘라이자 윈스턴 파일을 중심으로 83-84쪽, 110-111쪽 및 제2부 ‘대비책’ 참조.
- 8 1946년 9월, 25만 명 이상의 노동자가 총파업에 참여했다. 이들은 존 호지 장군이 이끄는 주한미군정(USAMGIK)에 반대하며, 조선인민공화국을 구성하는 인민위원회에로의 권력 이양을 요구했다. 총파업은 1946년 9월 23일 부산 철도 노동자로 시작해 이튿날 다른 노조들이 합류한 파업, 그리고 경찰이 파업 참가자들을 향해 발포한 사건을 계기로 촉발되었다. 파업 참가자들은 (굶주리고 있었기에) 쌀 배급과 임금 인상, 해고 반대, 노동 운동의 자유를 요구했다. 학생들도 가세하여 식민지 교육의 철폐를 외쳤다. 주한미군정은 2천 명의 병력을 투입했고, 수천 명이 희생되었으며, 이 시점에서 이미 모순에 가까운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 9 주철희,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 126쪽.
- 10 1946년 미군 조사에서 응답자의 77%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지지한다고 답했다. 송해영, 『한국의 국가, 계급, 발전주의』(Routledge, 2020), 78쪽 참조.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지지는, 한편으로 토지 개혁, 경제적·사회적 평등, 민주적 통치, 협동 또는 공유 기반 사회에 대한 민중의 염원을 미군이 이념적 공포심으로 번역한 것이었다. 이는 유구한 요구였으며, 다수가 빈곤하고 억압된 조건 속에서 살아가던 한국의 현실을 감안하면 지극히 타당한 것이기도 했다. 또 한편, 다른 나라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이 독립운동의 중추였다는 점에서 그러한 지지는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 11 병사들의 기록 말살은 다큐멘터리 창작공동체 ‘욱희씨네’가 뉴스타파를 위해 제작한 여순사건 3부작 탐사 영상 시리즈의 출발점이다. “1948, 사라진 병사들: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https://withnewstapa.org/1948-missing-soldiers/
- 12 코넬 장, 『균열된 해방: 미군정 아래 한국』, 5쪽.
- 13 코넬 장의 책은 일본 식민지배 종식 후 만연했던 민주적·평등주의적 열망을 미국이 치명적으로 종식시킨 방식을 상세하고 명료하게 분석한다는 점에서 독보적이다. 툴라니 데이비스, 『해방회로: 자유의 문화를 만들어 낸 흑인 행동주의』(듀크대학출판부, 2022).
- 14 내가 ‘의도적으로’라고 말하는 것은, 미국인들이 제주가 인민위원회의 모범적인 통치 역량을 보여주는 사례임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코넬 장은 존 호지 장군의 고문들 중 상당 수가 토지 개혁, 노동권, 친일파 청산, 공동체 전통 존중 등 필요한 조치들을 수차례 조언했음에도 장군이 이를 거듭 묵살했음을 명백히 입증하고 있다.
- 15 에이버리 F. 고든, 〈삶의 형식은 살아 있는 자들을 압박한다: 1948년의 반향들〉(2024) 참조. 글래스고에서 열린 ARIKA, Episode 11에서 발표. 접근 가능 주소: https://averygordon.net/projects/the-form-of-life-presses-on-the-living-1948-reverberations. 이 글에서는 1949년 건국된 중화인민공화국이 이야기에서 차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다룰 여유가 없다.
- 16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 선포에서 지휘관과 병사들의 역할은 복잡한 문제로, 연구자들과 법원이 규명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이다. https://www.koreatimes.co.kr/southkorea/society/20241205/did-young-soldiers-hesitation-help-national-assembly-lift-martial-law 및 https://www.koreatimes.co.kr/southkorea/defense/20241210/some-officers-soldiers-resisted-martial-law-orders-in-their-own-ways 참조. 초기 비판적 분석으로는 박현옥, 〈12.3 내란 이후 한국의 정치에 관하여〉(Positions Praxis, 2024년 12월 13일) https://positionspolitics.org/hyun-ok-park-on-politics-after-12-3-insurrection-in-south-korea/ 참조.
- 17 https://www.chosun.com/english/national-en/2025/10/20/TMI6CKKFIVHWVD7SETXAWZ3SOM/
- 18 이 날짜들은 상징적인 것으로,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삼일절), 1987년 6월 민주항쟁, 그리고 1996-1997년 총파업과 김대중 대통령 당선을 포함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