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로우
남태령의 밤, 해방의 성좌

어떤 순간들은 한 장소의 의미를 영원히 바꾸어 놓는다. 2024년 12월 21일 동짓날1 밤. 남태령 고개에서 그런 시간이 열렸다. 메트로폴리스 서울의 초입이라고는 하지만 그곳은 가파른 언덕을 깎아 만든 왕복 8차선 도로다. 상가나 편의시설은 커녕 인가도 드물어 밤이 되면 어두워진다. 군시설과 버스차고지가 있는 허허벌판 외진 곳이다. 농민들과 시민들이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함께 일 년 중 가장 긴 겨울 밤을 지새웠다. 국가는 농민들의 행진로를 막기 위해 경찰 차벽을 세웠고, 트랙터가 도시로 들어오는 것을 금지했다. 단순히 길이 막힌 것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사람들을 통제하고 억누르려는 부패한 권력이 있었고, 동시에 그 탄압에 맞서 서로를 지키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있었다. 누군가는 음식을 나누고, 누군가는 담요를 건네고, 누군가는 낯선 이의 이야기를 들었고, 누군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지휘도 없었고 명령도 없었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 시간을 함께 건너야만 한다는 것을. 남태령에서 처음 서로를 마주한 낯선 사람들은 순식간에 이웃이 되고 그 광장은 이내 커다란 나의 일부로 변화했다.

남태령의 밤이 있기 3주 전, 12월 3일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전국의 시민들이 국회로 모여든 덕분에 계엄군의 작전은 지연되었고, 국회의원들이 빠른 시간에 계엄을 해제시킬 수 있었다. 불법 계엄, 친위 쿠데타, 내란이었다. 계엄 해제 이후에도 매일 국회 주변에서 농성하는 시민들과, 국회의원, 보좌관, 당직자들이 국회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2차 계엄을 막았다. 시민들은 여의도에서 윤석열 탄핵을 요구하는 대규모 집회를 거의 매일 열기 시작했다. 시위의 풍경은 완전히 새로웠다. 토요일마다 국회 앞의 광장은 언제나 응원봉을 든 청년 여성들로 가득했고, 집회 무대에서는 K-pop 음악을 연달아 틀면서 개사한 탄핵구호를 노래처럼 연호했다. 리듬에 맞춰 흔들리는 응원봉들이 형형색색 거대한 빛의 파도2를 만들었다. 그 파도의 힘은 강력했다. 첫 번째 표결이 여당의 집단 퇴장으로 무산되는 우여곡절 끝에 2차 표결에서 탄핵이 가결되었다. 팽팽한 긴장과 분노 속에 표결 과정을 지켜보던 시민들은 승리의 함성을 질렀고,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3’가 울려 퍼졌다.

그날 낮 여의도에 농민들이 올린 상여4가 행진을 했다. 불법계엄 이후 사람들의 관심이 광장을 향해 있을 때, 나는 시민들과 농민들을 연결하고 싶었고 “전봉준투쟁단5”에 상여투쟁을 제안하며 이 과정과 내용을 나의 개인 트위터6 계정에 올렸다. 이 소식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고 농민들을 응원하는 연대시민들의 관심과 호응이 폭발했다. 이 관심이 트랙터 대행진까지 이어지며 놀라운 정도의 물심양면 후원이 쏟아졌다. 그때부터 나는 책임감이 생겨 본격적으로 농민과 시민을 연결하고 소통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농민운동이 이렇게 많은 후원과 응원을 받은 적이 있을까 싶었다. 국토 최남단인 경남 진주의 동군, 전남 무안의 서군으로 시작한 전봉준투쟁단의 트랙터 대행진은 동학농민운동의 최후 격전지인 공주 우금티에서 만났다. 합류 후 결의대회를 가진 뒤, 천안, 수원을 거쳐 남태령을 통해 광화문에 도착해 본 집회에서 행진할 예정이었다. 시민들은 트랙터 행렬을 서울에서 볼 수 있길 고대했다. 그러나 그 기대는 남태령에서 가로막혔다. 경기도까지는 경찰의 호위 속에 순조롭게 올라왔는데 갑자기 서울 입구에 도달하자 통행을 제지당한 것이다. 시민들은 단체로 온라인 국민신문고에 항의 민원을 넣었고 엄청난 양의 민원에 못 이긴 경찰의 요청으로 신문고가 일시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졌다.

결국 12월 21일 낮 12시 반 경, 경찰이 트랙터 행렬을 사방에서 가로막고 트랙터의 유리문을 부수고 농민들을 강제로 끌어내고 밀고 때리며 폭력적인 강제진압을 시작했다. 이 장면을 담은 10초 정도의 영상이 나의 SNS 계정을 포함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게시되자마자 급속도로 전파되었고, 사람들이 남태령 현장에 달려가기 시작했다. 농민들은 물리적인 충돌 이후 경찰과 거리를 두고 대오를 정비한 뒤에 문화제와 농성을 이어갔다. 같은 날 광화문에서 시위하고 있던 응원봉을 든 청년 여성들은 전봉준투쟁단의 농성현장에 합류했고, 농민들을 가로막은 경찰에 항의하기 시작했다. 경찰들은 비농민 시민들이 합류하자, 조금은 물러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농민들과 연대시민들을 사방으로 에워싸고 왕복 8차선을 모두 통제한 뒤 고립시켰다. 한 해 중 가장 긴 밤. 영하 12도. 고갯길 언덕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이 살을 에는 듯한 추위. 주변에 편의시설이나 상점이 전혀 없고 물, 전기, 난방, 식음료, 화장실 아무것도 갖춰지지 않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실제로 저체온증을 보이는 시민들이 속출하는 비상 재난 상황에 몰아넣어졌다.

그 고립의 조건 안에서 기획되지 않은 실천들이 발생했다. 국회의원과 변호사, 의료진 등 다양한 단위에서의 연대가 계속 이어졌다. 해외에 있는 동포들이 급히 모금해 파견된 ‘난방버스’도 도착했다. 사당역 일대 온갖 식당과 카페에서부터 익명의 주문자가 보내온 뜨거운 식음료들이 배달되었다. 핫팩, 담요, 보조배터리, 의약품, 생리대가 모였다. 나는 밤새도록 언 손을 녹여가며 핸드폰으로 수없이 연락을 주고 받았다. 도움을 요청하고 보내온 지원을 잘 받을 수 있게 전달했다. 어느 순간부터 누군가 돗자리를 깔고 후원물품을 분류해 모으고 배분했다. 쓰레기는 플라스틱, 유리, 종이, 음식물, 일반쓰레기 등으로 질서정연하게 분리수거했다. 남태령역에서 근무하는 역무원들이 이례적으로 막차 이후에도 문을 열어 화장실과 임시 휴식공간을 제공했고, 여성들이 압도적으로 많았기에 남성 화장실이 여성에게 일시적으로 개방되었다. 택시가 우회로를 통해 시위 현장에 시민들을 이송했고, 배달 라이더 노동자들 역시 봉쇄선을 넘어 음식과 물품들을 날랐다. 어떠한 중앙 조직도 이것을 기획하지 않았다. 참가자들이 각자의 생활 속에서 익혀온 돌봄과 환대의 실천이 위기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활성화되었다. 그 집합적 실천이 물적 공간을 구성했다.

부당한 권력이 사람들에게 각자도생하라, 폭력통치에 복종하라, “가만히 있으라”7 명령하자 사람들은 정 반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집에서 뛰쳐나와 생전 본적 없는 사람들의 얼굴을 마주했고 이내 그들의 안위를 걱정하고 내가 내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내어주고, 그와 동시에 타인이 내어준 모든 것을 받았다. 그리고 그동안 내가 이 사람들을, 내 밥을 지어주고 온기를 내어주는 이웃, 즉 농민을 생각하거나 염려하지 않았었다는 부끄러움을 자유발언으로써 고백했다.

남태령의 자유발언대는 제도적 공론장의 문법과 다른 방식으로 작동했다. 발언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약자성과 소수자 정체성을 공개적으로 언명하는 방식으로 발언을 시작했다. 여성, 페미니스트, 성소수자, 전세사기 피해자, 성폭력, 학교폭력, 가정폭력, 국가폭력 등 각종 폭력의 피해자이자 생존자, 유족, 청소년, 장애인, 빈민, 이주배경 시민, 지방 출신 청년, 농민 등. 이러한 자기소개는 형식적인 도입부가 아니라, 차이를 은폐하지 않고 전면화하는 정치적 실천이었다. 이후 농민들과 연대시민들은 약자와 소수자를 향한 연대 표명과 함께 불공정과 차별과 혐오를 일상화하는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역설했다. 발언대 역시 준비된 각본이 있다거나 연출자나 시설이 있는 공식 무대가 아니었다. 트랙터 로더 바스켓으로 만든 무릎 정도 오는 낮은 임시 무대에 꼬마전구로 급히 꾸미고, 소형 스피커를 사용해서 있는 힘껏 목소리를 냈다. 내 앞에 있는 발언자의 떨림과 청중의 눈빛이 서로 빤히 보이는 거리였다. 일방적인 선언이라기보다 대화에 가까웠다. 대화의 과정에서 감응한 사람들이 용기를 내서 자신의 발언문을 적고 발언할 순서를 기다렸다. 남태령에서 시민들이 공통적으로 증언하는 안전감은 경찰 폭력으로부터의 안전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나로 존재해도 괜찮은 상태, 존재론적 안전감에 더 가까웠다. 주체의 현존이 존중받는 공간은 타자의 현존을 존중하고 염려하는 실천의 축적으로 확장되었다.

발언자 대기줄이 점점 길어지더니 나중엔 6시간 정도를 기다려야 발언 순서가 돌아올 정도였다. 발언들의 내용은 우리가 원하는 해방을 선취하리라는 주문 같았다. 이 모든 목소리를 하나도 빠짐없이 다 듣고 나면, 이 나라와, 세계와 우리의 공동체가 달라져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만들었다. 전국의 수많은 광장 발언을 녹취하는 작업을 하신 분이 남태령의 발언은 “살이 떨렸다”라고 했다. 물론 윤석열 체포와 국민의 힘 해체, 경찰 규탄의 구호가 계속되긴 했지만,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안티테제, 부정, 파괴와 폭력의 추동이 아니라 소외됐던 이웃에 대한 미안함, 고마움, 연대하고자 하는 마음을 공유하고, 해방을 향한 변화의 촉구를 요청했다.

또한 부동산 가격 폭등, 학벌주의와 엘리트 중심주의 사회, 지역갈등, 혐오 정치, 천민자본주의가 일으키는 수많은 사회문제, 전 세계 민주주의의 위기와 전쟁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한국 사회의 산적한 문제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다 나열하기도 어려울 만큼 정치적이고 구체적인 주제들로 한껏 뻗어나갔다. 지금, 이 비상 상황의 원인은 윤석열 개인만이 아니라 고질적인 사회구조의 문제라는 의견에 모두가 동의했고, 문제 해결과 대안 실현에 함께 하자 외치며 청중의 우렁찬 결의 표명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내 존재의 인정뿐만 아니라 민중의 자치, 대중 통치를 상상하고 이 위기 다음에 올 민주주의 사회의 재건을 제안했던 이상향의 공론장이기도 했다. 대통령 후보자 토론회에서도 따라오지 못할 엄청난 열기와 높은 수준의 토론과 기획이 펼쳐졌다. 이름 모를 평범한 시민들도 단단한 민주적 공동체, 좋은 나라를 고안하고 건설하고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진실이 다시 증명됐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함께 심장을 불태우는 순간이었다. 이 역사적인 장면은 130년 전부터 시작된 동학의 염원을 담은 새로운 대동세상 건설의 과정으로 광장의 성격을 변모시켰다. 이 특별한 전환으로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초인적인 인내력과 책임감, 서로를 도움으로써 자신을 일으켜 세우려는 에너지를 얻었고 그 힘은 마치 거대한 자석이 된 것처럼 사람들을 남태령으로 불러 모았다.

추위와 배고픔에 떨며 서로에게 기대 밤을 샌 다음 날, 아침 첫차가 시작된 후로 남태령역에서 사람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1,000명 남짓의 밤샘조는 어느새 선두에서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왕복 8차선의 공간을 가득 채우는 거대한 인파가 되었다. 이렇게 엄청난 저항 앞에서 경찰은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남태령의 농민들과 시민연대는 끝내 공권력의 탄압을 해체하고 경찰차벽을 열어 트랙터를 운전해 사당역, 용산 대통령 관저까지 11km를 행진했다. 관저 앞 마무리 집회는 거의 축제 분위기였다. 계엄 이후 내내 드리웠던, 어두운 마음을 그 순간만큼은 완전히 벗어던질 수 있었다. 모든 공식 집회가 끝나고 나서도 트랙터 대오가 완전히 복귀할 때까지 시민들은 농민들을 안전히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거리에 남아 계속 농민들을 응원하고 경찰을 규탄하는 구호를 함께 외쳤다. 그리고 하나둘 트랙터들이 도심을 빠져나가고 마지막 트랙터가 우렁찬 엔진소리와 함께 복귀하는 길에 올랐을 때 모두가 진심 어린 환호와 감사 인사를 외쳤다. “우리가 이긴다”였던 구호는 “우리가 이겼다”로 바뀌었고 북받친 감정에 응원봉을 흔들던 시민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반주도 없이 ‘다시 만난 세계’를 소리 높여 불렀다. 경찰이 농민들을 가로막은 지 32시간만에 시위가 마무리되었다. 이 사건이 2024년 12월 남태령 대첩이라는 이름으로 회자되며, 한국사회에 단절되어 있던 시민연대의 뜨거운 연쇄반응을 만들어 냈다. 안국역, 혜화역 장애인이동권 투쟁, 참사가 일어난 무안공항, 용산 대통령관저 앞 키세스 집회, 세종호텔 복직투쟁, 동덕여대의 학생탄압 규탄, 전국 곳곳의 고공 농성장, 파면 선고를 중계한 헌법재판소 앞 광장까지. 남태령은 끊임없이 곳곳에서 호명되었다.

남태령은 해방공간이었다. '해방공간'은 1945년 해방 직후부터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의 과도기를 일컫는 역사용어이지만, 동시에 제도 바깥에서 대안적 사회관계가 실험되는 현재진행형의 공간을 가리키기도 한다. 해방은 저항의 과정을 필수적으로 동반한다. 그냥 주어지는 것, 위로부터 허가된 것은 해방이 아니다. 남태령은 국가나 권력이 허락한 공간이 아니었고 그렇기 때문에 해방공간이 등장할 수 있었다. 오히려 국가가 시민들을 봉쇄하려 한 공간에서, 고립된 몸들이 서로를 돌보는 실천을 통해 구성한 비상 상황 속의 안전공간이었다. 중심의 기획력이나 필연성이 부재한 우발적·주변화 된 조건은 남태령을 구조적으로 취약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사건의 잠재성이 다방향으로 전파될 수 있는 토대이기도 했다.

남태령이라는 이름은 명사인 동시에 동사다. 남태령에서 시작된 동시다발적 연대의 실천은 서로돌봄과 의식화8라는 남태령의 실천 방식이 각 현장에서 재구성되고 재발명되는 과정이었다. 해방공간은 완성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실천하는 몸들이 모일 때마다 다시 구성된다. 해방공간은 박제된 승리의 기념비가 아니라, 일상에서나 비상 상황에서나 언제나 계속 고쳐 쓰는 생활의 기술이자 관계의 형식이다. 국가, 정치, 헤게모니 프레임을 넘어서는 자율적 공동체 운영. 그곳에서 가장 먼저 생긴 것은 규율이나 구호가 아니라 돌봄 인프라의 ‘작동’이다. 남태령에 온 모든 사람에게 누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누가 지치고 있는지 감지하는 능력, 그것에 맞게 자원을 배치하는 감각이 생겼다. 심지어 그 현장에 직접 있지 않더라도 현대사회 기술들로 전 세계의 사람들이 남태령에 접속할 수 있었고 그들 또한 남태령을 지탱하는데 기여했다. 우리는 서로를 돌봄으로써, 서로를 설득했다. 돌봄은 사람들을 남게 만드는 힘이었고 사람들을 불러내는 기원이었다. 누구나 교사이자 학생이고 교과서였다. 우리가 배운 것은 ‘정답’이 아니라 ‘함께 판단하고 함께 책임지는, 연대하는 법’이었다.

나는 광장을 ‘분노가 모인 자리’, ‘공권력과의 힘겨루기’로만 기억하고 싶지 않다. 분노는 사람들을 광장에 나오게 한 핵심 정서지만 분노만으로는 광장이 유지될 수 없다. 분노, 슬픔, 애도, 죄책감, 좌절감 등 강렬한 정동이 직접행동의 원동력으로서 작동하고 나면 광장은 서로를 먹이고, 재우고, 듣고, 배우는 방식으로 비로소 성립한다. 돌봄은 부차적 지원이 아니라 광장정치의 형식이다. 돌봄은 시혜나 선의가 아니라 광장의 인프라다. 이 재생산의 정치는 오랫동안 소위 ‘여성의 몫’으로 밀려나고 평가절하되어 온 역할과 노동의 내용을 새롭게 보이게 했다. 먹을 것을 준비하고, 몸의 상태를 살피고,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고, 관계의 온도를 유지하는 일은 흔히 ‘돕는 일’, ‘부수적인 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러한 노동 없이는 어떤 집회도, 어떤 공동체도, 어떤 정치도 지속될 수 없다. 남태령에서 자발적으로 작동한 돌봄의 인프라는 바로 그 사실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이 땅을 일구어 온 여성농민들이 그림자처럼 재생산노동을 하고, 오랫동안 땅과 씨앗을 보존하고, 먹거리를 길러내고, 텃밭과 부엌과 마을의 순환을 떠받쳐 온 경험은 광장 한복판에서 새로운 형태로 되살아났다. 트랙터가 경찰차와 맞서며 전쟁을 방불케하는 힘대결의 스펙타클을 만들어냈고 사람들은 환호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여성들은 기민하게 소식을 전달하고, 상황을 판단하고, 위험을 감지하고, 대비책을 세우고, 소진된 사람들을 지원하고, 밀려들어오는 인파를 환대했다. 정말 수많은 여성들이 있었다. 그리고 나도 한 사람의 여성농민이자 응원봉과 깃발을 들고 흔들던 청년여성으로 그 자리를 지켰다. 남태령의 돌봄은 우연히 발생한 선의가 아니라, 그동안 보이지 않게 축적되어 온 가치의 사회적 귀환이었다. 남태령은 저항의 공간인 동시에, 서로를 다시 살게 하는 생활 기술이 정치로 출현한 공간이었다.

이 덕분에 농민들과 청년 여성, 페미니스트, 성소수자, 각종 사회적 약자들이 아주 빠르게 서로를 이해하고 환대했다. 이것은 단순히 ‘좋은 마음’이나 일시적 감동으로만 설명하기 어렵다. 그 장면에는 차이를 감지하고 공존시키는 오래된 감각이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농민에게 세계는 본래부터 균질한 것이 아니다. 매끈하고 직선적인 시간선이 아니다. 삶과 죽음의 연속이고, 하루하루가 우발적이고 변화무쌍한 것들과의 만남이고, 조율 과정이고, 순환이다. 같은 종이라도 씨앗들이 지역에 따라 다르고, 같은 씨앗도 해마다 다르게 자라며, 같은 밭이라도 토질과 볕과 바람과 습기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낳는다. 농사는 하나의 기준으로 모든 것을 평준화하여 자동화하거나 자본으로 종속시키는 일이 아니라, 각 생명의 미세한 차이를 읽고 그 차이에 맞게 응답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자연 속에 공생하는 것에 가깝다. 어떤 것은 더디 자라고, 어떤 것은 쉽게 상하고, 어떤 것은 조금 작더라도 척박한 조건에서 잘 살아남는다. 농사의 역사는 이런 차이들을 구별하면서도 통합하며 기억하고 돌보는 방식으로 형성된다. 이 기억과 실천을 담지하는 몸은 바로 여성농민들이다. 전 세계의 여성농민들은 종자를 보전하고, 심고 거두어 계승함으로써 농민 주권을 행사함과 동시에 생태계 다양성의 한 축을 지탱한다.

오늘날 모두의 공유자원이었던 씨앗이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하며 다국적 기업이 농민을 통제한다. 생물의 다양성은 축소되며 패권국의 식량무기화가 이루어졌다. 이제 우리가 만나는 대부분의 씨앗은 씨앗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재생산 능력을 상실했다. 상업 종자회사의 종자들은 후대 재배가 불가능하거나 재파종 시 법적 제재를 당하게 된다. 농민은 매년 종자를 새로 구매해야 하고 이 이익은 고스란히 다국적 대기업에 귀속된다. 더 나아가 기업들은 유전자조작을 통해 해당 종자에만 작동하는 화학농약과 화학비료 등 농자재를 패키지로 구매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어 농민들을 착취하고 무기력하게 만든다.

이런 무감각하고 파괴적인 횡포로 인해 생물다양성도 급격히 사라졌다. 농민들이 보존하지 않으면 토종종자들은 사라진다. 다양성이 사라진 자리에는 효율이 아니라 불안정성이 남는다. 종자 주권의 위기는 곧 생태적 회복력의 붕괴를 의미한다. 씨앗을 선별하고 저장하며 교환하는 기술은 오랫동안 농민, 특히 여성농민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종자의 자본화와 제도적 규제는 이러한 지식을 비가시화하고, 공식적인 농업 기술 체계 밖으로 밀어낸다. 그 결과 세대를 통해 축적된 생활 지식과 문화의 소멸이라는 위기를 동시에 겪게 된다. 종자 주권의 문제는 재생산 체계 전체를 둘러싼 정치적 문제로 이해되어야 한다. 종자는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시간과 관계, 지역성과 기억이 축적된 ‘생명 인프라’이기 때문이다.

커먼즈의 사유화, 모든 것이 가치 창출의 부속품이 되는 시대에서는 우리의 삶조차 우리가 결정할 수 없게 된다. 친자본주의적 농업 체계는 생산을 효율과 수익 중심으로 조직되어왔다. 농업이 본래 가지고 있던 재생산의 기능, 즉 생명을 이어가고, 공동체를 유지하며,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역할을 주변화시켰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구조에 저항하는 여성농민들은 토종 종자 보존 운동, 소농 기반 생산, 돌봄 중심의 농업, 그리고 여성농민 권리 보장 운동을 통해 농업을 농생태 재생산의 영역으로 다시 위치시키고 있다. 토종 종자 보존은 생명 인프라를 커먼즈로 유지하려는 실천이다. 생명의 연속성을 공동으로 관리하는 행위이며, 이는 사유화된 종자 체계에 대한 실질적인 저항이다. “농부는 굶어 죽더라도 종자를 베고 죽는다”라는 옛말이 있다. 농민들은 종자를 상품으로 전환하는 자본의 논리에 맞서, 다양성과 지역성을 기반으로 농업의 회복력을 유지한다.

농업은 가족과 지역 공동체의 생존을 책임지는 과정이며, 관계를 유지하고 삶을 지속시키는 돌봄의 실천이다. 이 지점에서 여성농민의 운동은 주권 보장 운동으로 확장된다. 온전한 농민으로서 법적 지위를 보장받고, 종자 저장과 교환의 권리를 사회에 요구한다. 복지나 지원의 문제가 아니라, 농업농촌의 주체로서 인정받기 위한 정치적 요구다. 누가 감히 농업과 생태를 사유화하고, 통제하고 있는가를 묻는 문제 제기다. 이러한 여성농민의 실천은 남태령 광장 경험에 중요한 방식으로 연결된다. 여성농민이 기후위기 시대에 생물다양성과 농민주권을 수호하고자 자생할 수 있는 조건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실천을 지속하는 것처럼 배제되고 도구화 되었던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 소수자들의 주권회복을 외치고, 주권자들의 무대를 만들고 그들을 주체로 세우는 일 말이다. 혁명은 주변부에서 온다. 남태령 집회는 도로 위에서 새로운 형태의 관계와 재생산이 구성된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농민들은 늘 그래왔던 것처럼 서로를 돌보고, 자원을 나누며, 낯선 이들을 환대하는 방식으로 공동체를 만들어냈다.

나이 지긋한 농민이 남태령에 온 한 청년에게 “우리 딸, 수고했어”라고 감사인사를 전했다. 그러자 그 인사를 받은 청년은 갑자기 용기를 내서 “논 바이너리”라는 문구가 적힌 깃발을 펼치며 “죄송한데 저는 딸이 아니라 논 바이너리”라고 자기소개를 했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농민이 “그렇구나, 알아두겠다”라고 답변했다는 에피소드가 유명해졌다. 아마 그 농민은 ‘논 바이너리’라는 말을 처음 들어봤을 것이다. 자식뻘의 여성으로 보이는 그 사람이 여성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누군가가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고, 자신이 약자, 소수자이며 차별과 폭력의 생존자임을 고백할 때, 그것을 단번에 이해할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그런 존재가 있다”라는 사실 자체를 거부하거나 회피하지 않는 태도. 좀 더 나아가 즉각적으로 저 사람과 내가 같은 인간으로 연대할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리는 능력. 그것은 어쩌면 다양한 생명의 형질과 조건을 오래 다뤄온 사람들에게서 더 쉽게 나타날 수 있는 감각인지도 모른다. 다 같이 ‘콩’이라 불리지만 콩이라는 이름 아래 3,824가지 씨앗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에게 차이는 제거되어야 할 예외가 아니라, 세계가 원래부터 이루고 있는 조건이다. 씨앗을 심고 돌보고 거두어 나누고 다시 심는 것이 농민의 권리라고 평생을 주장해 온 사람들은 자신에게 온 것을 소중히 대하는 것에 능하다. 남태령에서 농민들이 도시에 사는 온갖 종류 약자, 소수자들의 발언을 온전히 듣고, 시민들이 다시 농민의 삶과 분노를 새롭게 이해하게 된 것은, 서로의 다름을 지운 채 하나의 힘으로 통합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다름을 가진 채, 그 모든 다양함을 넉넉히 감싸안아 낼 수 있는 농민의 성정으로 말미암아 연잎 속에 모인 잡곡밥 덩이처럼 똘똘 뭉쳐 함께 밤을 건넜다. 그 연대는 어느때보다 더 강력했다.

연대란 종종 동일한 이해관계나 정체성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의 결합으로만 상상됐다. 사회변혁이란 더 강력한 헤게모니를 장악해 새로운 층위의 권력구조를 강화하려는 과정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남태령은 연대와 사회의 변화가 동일성과 권력구조 속의 파괴력에서만 시작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각자 다른 상처와 위치와 언어를 가진 사람들이, 상대의 삶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서로의 취약성을 공적인 문제로 받아들이고 함께 지키기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 그때 연대는 추상적인 구호가 아니라, 차이를 감당하는 감각의 문제이자 다른 삶이 있다는 사실을 견디는 훈련이 된다. 상대의 현존을 존중하고 나의 존재 또한 지켜낸다. 그리고 이 연결은 서로의 마주 봄, 돌봄을 요청함으로써 확대 재생산된다. 씨앗의 다양성이 생태계를 더 강인하면서도 유연하게 만들듯이, 서로 다른 존재들의 공존은 공동체의 안전망을 더 넓고 강인하게 만든다. 민주적 해방은 모두가 같은 사람이 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의 존재를 축소하지 않은 채 함께 버틸 수 있는 세계를 만드는 데서 시작된다.

이런 기적 같은 장면은 역사 속에서 반복됐다. 재난과 위기의 순간에 사람들은 서로에게 등을 돌린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의 행동이 훨씬 더 자주 나타난다. 연대와 이타주의, 자율성의 별자리는 우리 대부분의 마음속에 숨어 있다가 필요한 순간에 다시 나타난다. 사람들은 비상 상황이 닥쳤을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재난 그 자체로는 불행이지만 때때로 지옥을 관통해 도달하는 천국의 뒷문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잠시 경험하게 되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잠재해 있던 공동의 능력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단지 경제적, 이기적 성공만을 추구하는 존재일 뿐 아니라, 서로에게 기대고 연대를 갈망하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사람들은 회복력과 관용, 용기, 타인에 대한 애정과 사랑, 희생과 상호부조, 그리고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감각을 새롭게 자각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뜻밖의 안도감 혹은 즐거움을 발견하기도 한다. 인간의 잔혹함을 드러내기보다, 오히려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다른 가능성을 잠시 드러내 보인다. 그 안에 해방의 문을 여는 열쇠가 있다.

남태령의 밤도 완전히 새롭게 독립된 사건이라기보다 역사 속에서 번쩍이며 나타났던 다른 순간들과 이어져 있다. 1871년 파리에서 노동자들이 도시를 스스로 다스리기 시작했던 순간, 1894년 동학의 농민들이 사람이 곧 하늘이라 외치며 봉기했던 순간, 1919년 조선의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독립을 외치고, 1945년 식민 통치의 질서가 무너지며 해방공간의 가능성이 열렸던 시간, 1967년 이웃의 죽음을 함께 애도하기 위해 시작된 베네수엘라의 세코세솔라, 1968년 지금과 다른 삶을 상상했던 전 세계 학생과 민중의 광장들, 1980년 광주에서 서로를 지키며 한반도의 민주주의를 몸으로 만들었던 순간. 이런 사건들은 서로 떨어진 역사적 에피소드가 아니라, 어두운 하늘 위에 흩어져 있는 별들처럼 서로를 비추며 하나의 성좌를 이룬다. 역사는 단순히 시간의 연속 속에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이런 순간들이 서로를 비추는 방식 속에서 읽힌다. 과거의 진정한 이미지는 그것이 인식될 수 있는 순간에 번쩍이며 나타난다. 우리는 그 별자리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사건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읽어낼 수 있는 사람들이고 결국엔 그 역사의 산물 자체다. 그 능력 덕분에 우리는 흘러가는 역사 속 해방의 순간들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본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남태령의 밤도 그 성좌 속에 놓여있다. 그것은 단지 서울의 한 고개에서 벌어진 집회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반복되어 온 해방의 순간들 사이에 새로 떠오른 하나의 별이다. 그 별은 우리가 지나온 길을 비추고,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예고한다. 그래서 남태령은 끝난 사건이 아니라 계속 읽혀야 할 순간이 된다. 우리가 그 별자리를 읽을 수 있는 한, 또 다른 순간들이 언제든 다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미, 우리가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새로운 별들이 어둠 속에서 떠오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농민이라는 이름에 쓰이는 한자 농農은 별 진辰 자와 가락, 혹은 굽이를 뜻하는 곡曲자가 합쳐져 있다. 별을 노래하는 것, 별의 굽은 궤적을 읽는 사람이 농민인 것이다. 완전히 불탄 것 같은 황무지에도 봄이 오면 새로운 싹이 솟아오르듯이. 우리 안의 별을 노래하며 우리의 씨앗을 기억하고, 간직하고, 뿌리고, 돌보고, 나누며, 보존해야 한다.9

참고문헌
  • 김후주. 「농민운동 리부트: 시민 항쟁의 상징이 된 트랙터와 남태령 대첩」, 『농촌사회』, 35(1), 257-271, 2025
  • 김후주. 「남태령에서 다시 만난 세계 : 광장만이 줄 수 있는 연대감, 민주주의 체화의 경험」, 『황해문화』 126호, 166-173, 2025
  • 레베카 솔닛, 『이 폐허를 응시하라』, 정혜영 역, 펜타그램, 2012
  •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 폭력비판을 위하여 / 초현실주의 외』, 최성만 역, 길, 2008
  • 발터 벤야민, 『아케이드 프로젝트』, 조형준 역, 새물결, 2005
  • 존 버거, 『끈질긴 땅』, 김현우 역, 열화당, 2019
  • 주디스 버틀러,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김응산, 양효실 역, 창비, 2020
  • 파울로 프레이리, 『페다고지』, 남경태, 허진 역, 그린비, 2018
  • 1 동지(冬至)는 일년 중 밤이 가장 긴 날을 이르는 세시풍속 절기 용어.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기 때문에 작은 설이라고 여길만큼 중요하게 여기는 날이다.
  • 2 실제로 전체 시위인구의 3분의 1이 2030 여성으로 집계되며 압도적 비율을 차지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청년여성들이 응원봉으로 광장의 분위기를 바꾸며 시위를 주도하며 새로운 민주주의 정치주체로서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 3 2007년 발표된 K-pop걸그룹 소녀시대의 데뷔곡. 2016년 이화여자대학교 미래라이프대학 설립 반대 시위 중 학생들이 총장과 교직원을 만나기 위해 본관을 점거했다. 농성 중인 학생들을 폭력진압하려 투입된 1,600명의 경찰력에 맞서 학생들이 이 곡을 부르며 저항하는 장면이 유명해지면서 새로운 시위곡, 주로 청년여성들이 모이는 시위에서 꼭 제창되는 민중가요의 일종으로 자리잡았다. 이 시위는 세월호 참사와 함께 박근혜 탄핵의 도화선이 되었다.
  • 4 한국 전통 장례식에서 여러 사람이 함께 관을 장지까지 운반할 수 있도록 만든 가마형태의 도구. 농민들은 저항이나 시위의 의미로 화려한 상여행진을 한다.
  • 5 2016년에 한국의 농민단체인 전국농민회총연맹,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가톨릭농민회가 공동으로 결성한 투쟁조직. 2015년 쌀 개방 반대 시위를 하다가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사망한 백남기 농민을 기리며,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인 전봉준의 이름을 따라 결성. 이후 활동이 중지되었다가 계엄이 있기 전 해인 24년 11월 재결성하여 정권퇴진 운동을 계엄 전부터 이미 하고 있었다.
  • 6 일론 머스크 인수 후 바뀐 X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twitter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광장에서 활동한 사람들의 룰이다. 상여투쟁을 홍보한 트윗은 https://x.com/symposion_/status/1867134269610770570?s=20
  • 7 2014년 4월 16일. 인천에서 제주도로 이동하던 대형 여객선 세월호가 침몰하는 사고가 벌어졌고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던 고등학생과 교사 261명을 포함한 304명이 사망했다. 사고가 발생했을 때 기내에 “위험하니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라는 안내방송이 23번이나 반복재생 되었다. 이 방송이 전원구조 가능했던 상황에서 300명이 넘는 희생자를 만들어낸 결정적 원인으로 밝혀지며 시민들의 공분을 샀다. (이 방송을 했던 선장과 승무원들 본인은 정작 탈출해 살아남았다.) 참사 이후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침묵행진에서 등장한 “가만히 있으라”라는 문구는 시민운동의 구호가 되었다.
  • 8 브라질의 교육운동가 파울로 프레이리의 개념으로 억압받는 사람들이 자신을 둘러싼 삶과 사회적·정치적 현실의 구조적 모순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그 현실을 변혁하기 위한 실천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 9 남태령에서 이어진 농민과 도시청년들의 연대는 파면 광장 이후에도 지속되고 있다. 각 지역의 농생태학 학교의 설립과 농업공동체의 연결, 도시와 시골을 왕래하는 관계인구 활동, 파머스 마켓과 토종씨앗 나눔, 도시 텃밭 등 대안을 모색하는 운동으로 이어졌다. https://namtaeryeong.net/
  • 김후주

    청년농부이자 활동가인 김후주의 실천은 오랫동안 농업 현장의 삶과 시민적 발언을 교차시키며, 디지털 공간과 물리적 광장을 유연하게 오가는 동시대적 정치 감각을 형성해 왔다. 농업의 일상적 노동에 뿌리를 두고, 그는 식량·토지·농촌의 삶을 주변적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 환경 지속가능성, 식량 주권, 공동의 생존과 직결된 핵심 의제로 제시한다.

연락처
제61회 베니스비엔날레 국제미술전 한국관
관람자 정보
전시 기간: 2026년 5월 9일 – 11월 22일
관람 시간: 10:00 – 1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