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로우
해빙기: 여자에게 여자가

나뭇잎이 기분 좋게 몸짓할 터이고 문자를 읽는 눈, 이어 속눈썹은 흔들린다. 옆자리에 누가 앉을지 모르는 긴장감이 있고 그건 적당히 들뜰 것이다. 걷거나 읽는 사람들, 그곳에 나의 수신자가 있다. 연약한 봄의 기세에 덧대어 글을 쓸 수 있을 줄 몰랐다. 봄은 사계의 시작이라, 어쩌면 당연스런 내 엄마 같기도 해서 언제나 다가가 안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게 멀어진 날들이 있었다지.

2024년 12월 3일. 시답지 않은 대화를 하며 밥을 먹고 있었는데, 앞에 앉은 이가 묘한 표정으로 계엄령이 떨어졌다고 말해주었다. 일을 하다가 잠시 끼니를 해결하는 듯 보였던 아저씨도 내게 뉴스를 봤냐고 물어왔다. 핸드폰이 꺼져서 자세한 내막을 확인할 수 없었으나, 계엄, 계엄, 계엄... 그 단어를 듣자 입안에 밥알을 굴리는 일이 어색해졌다. 심야의 식당은 시끄러웠고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벌건 얼굴로 성실히 소음을 만들고 있었다. 저 소음이 멎어 드는 게, 일상을 영위하는 사람들 사이사이로 피가 물드는 게 계엄이 아닐지. 그런데 어째서. 귓가에 끔찍한 무음과 소음이 번갈아 오갔다.

핸드폰을 충전하고 동료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몇은 이미 국회 앞일 거라 했고 몇몇은 나갈 채비를 하고 있을 거라고 전해주었다. 옷가지를 챙겨 입고 얼마 남지 않은 필름을 챙겨 그곳으로 향했다. 택시 안은 적막했고 차창 밖은 언제나처럼 빛이 흐드러지는 서울이었다. 대로변이 막혀 어정쩡한 곳에 내렸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서 있는 게 보였다. 묵묵한 공기 사이로 대치가 이어졌다. 우뚝 서 있는 사람들, 그들의 빠릿함. 이 풍경이 내재하고 있는 이미 일어난 일들과 이미 일어난 희생 앞에서 숙연해졌다. 새벽녘 해제된 계엄은 어떤 살상을 꿈꾸고 있었나. 치울 수 없는 커다란 철 혹은 돌을 바라보다 온 것처럼 갑갑한 느낌이 들었다.

잊고 지낸 불면이 고개를 내밀었다. 뉴스 기사를 보며 이상하게 들뜨기 시작했다. 무사하지 않음, 이라는 기시감이 다시 삶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계엄이라는 단어가 우습지 않아진 건, 광주에서 만난 한 여자 때문이었다. 한 친구와 리서치를 위해 5· 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들려줄 수 있는 이를 찾아다닌 적이 있다.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녔으나 한 여자의 이야기만이 나에게 다른 장면을 제시해 왔다. 재난과 참사, 국가 폭력. 타자가 겪는 일에 무감하던 때였는데 그녀가 소환하는 장면들이 무기력한 나를 일어나라고, 일어나서 싸우라고 뺨을 찰싹 때리는 것만 같았다. 허리가 굽은 그녀는 꽃이 피어난 옷을 입고 한산한 길가에 나타났다. 광주에 대한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우리를 기특해하면서도 경계심을 쉽게 허물지 않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기가 겪은 일을 차분하게 이야기하다가도 죽은 이들을 언급할 때면 먼 곳으로 홀연히 떠나는 듯 했다. 차마 가닿을 수 없는 곳, 그리운 곳으로.

그녀가 내게 재차 묻는 건, 여성 너머 노동자에 대한 감응력이 있냐는 것이었다. 그녀는 사업장에서 남자에게 지지 않기 위해 욕지기를 연습하고 미간을 일부러 찌푸렸다고 했다. 그녀는 말했다. “내가 한국노총 상급 단체에서 근무했다고 했잖아. 거기에 나 혼자 여자였어. 여자가. 거의 다 남자였어.” 그녀는 섬유 사업장에 며칠씩 숨어들어 전남 지역 노동조합의 조직을 도왔다.1 노조를 조직하고 계엄을 몸으로 겪은 시기, 그녀는 스물아홉이었다.

1980년 5월 18일. 그녀가 YWCA2에서 노조 교육을 강행하는 와중에 공수부대가 들이닥쳤다. 계림동, 동명동… 광주의 거리를 헤매던 그녀는 도청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시체 처리와 접수를 맡게 되었다. 차게 식은 살갗과 교련복, 파란색 비닐. 도청을 뛰어다니다 물컹이는 걸 밟으면 떠난 이들을 밟은 걸까 봐 심장이 조여왔다. 시간이 두려웠으나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도청의 시간이 끝난 뒤에 더 많이 앓기 시작했다고, 매해 오월이 되면 몸에 이유 모를 피멍과 부스럼이 올라온다고 했다. 그녀는 민주화 운동에서 주로 기억되는 건 남성, 학력을 가진 이들의 언어이니, 여성과 계급, 노동에 대해서 공부하고 느낀 뒤에 다시 만나자며 인사를 건네고 떠났다. 나는 그녀를 다시 보러 가지 못했다. 그 의제에 대하여 또렷하게 눈을 떴다고 느껴지는 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가 이송한 장면은 몸속 깊숙이 자리해 있었다. 계엄이 떨어진 날에 카메라를 챙겨 국회로 나가는 게 어렵지 않았다. 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으로 뭘 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타자를 고려하지 않은 채 뻗쳐나가는 낙관, 그런 빛깔을 가진 사진은 폭력이 될 수 있다고 깨닫는 순간이 있었다. 사진은 태어나기를 잔인하게 태어났고 점령의 위치에는 늘 사진이 있었다. 이 태생을 이해하지 않은 채 사진으로 낙관만을 지속한다면 침묵의 동조자가 되는 건 아닐지…. 사진으로, 내가 찍은 사진으로 그 무엇도 쉽게 낙관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 이제 그만할까요. 아니면 다시 할까요. 아직은 그만할 수 없는 예술가들이 모여 예술의 도구인 ‘연장’을 내려놓습니다.’ 세월호 참사 200일, 문화예술인 행동선언 연장전에서 사진가들이 카메라를 내려놓는 퍼포먼스를 했다. 그리고 다시 카메라를 들고 각자의 2014년 4월 16일로 떠났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란 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란 무망無妄의 상태가, 그럼에도 그것을 무릅쓰고3 시도하는 일이 그 어떤 희망이나 절망보다도 강인한 게 아닐까 짐작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음으로써 할 수 있는 것들.

「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희생자 추모! 온전한 수습과 피해자 권리 보장!
생명존중 안전사회 시민대회

일시: 2025년 1월 4일 (토) 오후 2시
장소: 윤석열 즉각 파면 퇴진, 사회 대개혁 5차 시민대행진 대회장
(경복궁역 4번 출구)

재난참사피해자연대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씨랜드 청소년 수련원 화재 참사,인천 인현동 화재 참사, 2.18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가습기살균제 참사, 7.18 공주사대부고 병영체험학습 참사, 4.16 세월호 참사, 스텔라데이지호 침몰 참사, 6.9 광주 학동 참사) 산재피해가족네트워크 다시는,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 협의회, 오송참사 유가족 협의회, 오송참사 생존자 협의회, 아리셀 산재 피해가족 협의회, 생명안전동행, 생명안전 시민넷, 4.16연대, 10.29 이태원참사 시민대책회의, 아리셀 중대재해 참사 대책위원회 」

이 나열에 아득함을 느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유가족은 4.16 세월호 유가족을 돕고, 4.16 세월호 유가족은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을 돕고.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은 12.29 제주항공 참사 유가족을 돕는다. 상실됨으로, 온전치 않음으로 서로의 존재를 꽉 끌어안는다. 새어나가지 않도록. 부디 살자고. 광주의 그녀가 나를 때린 자리가 화끈거렸고 연결이라는 단어를 다시 익힐 수 있었다.

나의 온전치 않음, 내 연장을 떠올렸다. 코닥에서 오랜 시간 일한 친구는 종종 일회용 필름 카메라를 보내주었다. 그 존재가 퍽 난처했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사진들을 남겼고 쓰던 카메라가 고장 났을 때나 적잖이 위급할 때에만 겨우 떠오르는 물건이었다. 필름이 없는 날이 되어서야 일회용 필름 카메라를 현장에 들고 나갔다. 내게 떨어진 조야한 이 사진들을 보며 생각했다. 사진이라는 단일한 사건은 아무 일도 할 수 없지만, 사진과 사진, 사진과 사진과 사진... 그 연결은 어떤 일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내겐 연약하고 허술한 사진-발언이 필요하다. 잘 부서지고 손끝에 전기가 오르는, 이 미미함이 일회용 필름 카메라-몸의 역량은 아닐까. 사진을 모으는 건 나의 오래된 연장이다. 일회용 필름 카메라를 지금 여기, 싸우는 여자들4에게 전해 보기로 한다. 이 사진들을 연결해 보자.

첫 번째 카메라, 박규현

도둑맞았다 쓰고 보니 애초에 가져 본 적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날 때부터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았다 고쳐 써 보니 희부연 무언가를 매만져 본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찾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는 기분이 들었다. 방향을 목적지를 출구를 잃어버린 기분, 자진해서 미로 속으로 걸어들어간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이 기분을 데리고 거리로 나갔다. 거리에는 각자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무엇이 시시각각으로 변해가는 걸 보면서

젠더와 인종과 연령과 신체를 이유로 폭력이 정당화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외침들 속에서

거리에서 무엇을 횡단하면서 무엇에 대해서

명료하게 정리할 수 있는 때가 올까. 지금이 아득하게 느껴지는 시간을 살아볼 수 있을까. 나의 예민함을 잘 지켜낼 수 있을까.

집으로 돌아와 주먹 쥔 손을 펼쳐보자면 무엇인가 생생했다. 낯설고 그러나 막역하게 용감무쌍했다.

살고 싶은 곳에서 살아가기 위해 해 보는

살아갈 궁리가.

두 번째 카메라, 익명의 샤이니 팬

저희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슬픔을 희망으로, 희망을 기쁨으로, 기쁨을 용기로 바꾸어 나가며 탄핵이 될때까지 광장으로 나갑니다.

세 번째 카메라, 강모래
네 번째 카메라, 김미카

쟤가 지뢰지 내가 지뢰냐.

다섯 번째 카메라, 연혜원

12월 14일 여의도 집회에서 내가 머문 곳은 여의도공원 문화의 마당에서 ‘윤석열 퇴진 성소수자 공동행동’이 형성한 ‘무지개존’이었다. 무지개존은 퀴어들이 집중적으로 한곳에 모임으로써 광장 안 퀴어의 존재를 더 가시화하고, 집회에서 퀴어에게 안전한 장소를 만들어 보자는 의도에서 만들어졌다. 내가 그날 무지개존을 찾은 이유는 집회에 혼자 갔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만큼 얼굴을 아는 이들과 있으면 덜 외로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12월 14일은 국회에서 지난주에 부결된 탄핵안에 대한 재표결이 있었던 날이고, 많은 이들이 가결을 기대한 만큼 정말 많은 사람들이 국회 앞에 모였다. 그만큼 나에게 이날의 집회는 가장 힘든 집회로 기억되고 있다. 박근혜 퇴진 이후 집권한 민주당이 여러 소수자에게 보인 냉대의 트라우마가 집회 내내 몰려왔다. 무지개존에 앉아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을까? 나는 무지개존을 둘러싸고 우뚝 서 있는 무지개 깃발들 사이에서도 속절없이 외로움을 느꼈다. 나에게 희미하게나마 웃음을 준 유일한 것은 어디를 돌아다니다 여기까지 온 것인지 모를 스피커에 붙은 호스트바 광고뿐이었다. 무지개존에서도 사람들은 자유발언을 이어 나갔고, 그날 주최측에서 준비한 무지개 플랜카드는 무지개존 밖의 시민들에게도 불티나게 배포되었다. 나는 추위 속에서 어떤 희망을 회피하고 싶은 것처럼 자꾸만 잠이 왔다. 기대하지 않고 싶은 마음과 그래도 기대하고 싶은 마음 사이를 사람들이 오고갔다. 탄핵안이 가결되고, 집에 돌아가기 직전에 무지개존에서 우연히 동네 주민을 만났다. 서로를 만나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여의도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탄핵안이 가결되고 국회의원들이 무대에 올라 마치 본인들이 승리한 듯 마이크를 잡는 것이 그렇게 꼴 보기가 싫었다. 우리는 인파에 쓸려 두 시간이나 걸려서 은평구로 돌아갔다. 아주 쓴 농담을 주고 받으면서.

여섯 번째 카메라, 심미섭, 윤이람, 이수연

2016년 페미당당은 dj doc가 여성혐오 가사를 담은 신곡을 촛불집회에서 부르지 못하게 보이콧하여 온 국민의 해일같은 비난을 받았다. 8년이 지나고 페미당당은 이랑의 초대로 무대 위에서 깃발을 흔들고 페미니스트의 목소리로 “늑대가 나타났다”를 외쳤다. - 미섭

광장에서는 불안 장애 때문에 신경안정제를 주머니에 넣어갔는데 필요가 없어서 신기했다. 처음 본 사람들과 단체활동 하는 것이 처음으로 두렵지 않았다. - 이람

여성들은 투쟁의 현장에서 각자의 목소리를 내며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그 속에서도 웃음과 즐거움을 잃지 않았다. 투쟁과 일상이 교차하는 순간들을 포착하며, 나는 그들의 강인함과 따뜻함에 다시 한번 감동 여자들 짱! - 수연.

일곱 번째 카메라, 전다정

나의 세계에는 만 3세와 이제 막 6개월에 접어든 영유아가 있다. 그 뒤에 내가 있고, 나의 뒤에 남편이라는 사람이 있다. 아이를 갖기 전 내가 일구었던 모음이며 자음 같은 것들은 이제는 채도가 빠져 잘 읽히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내가 가장 빨갛거나 파래지는 순간이 있다면, 나 스스로 부당하다고 반문을 품어 둥둥 떠다니는 물음표와 느낌표를 불러세워 차례대로 이의를 곱씹는 순간들이겠다. 대체로 내가 쓰는 젠더에 대한 사회적인 규범과 귀신같이 따라오는 기대에 맞물리는 지점들인데, 음성에서 비롯되는 가장 최근의 논조는 “애가 우는데” 였다. 애가 우는데 엄마가 어딜, 애가 우는데 엄마가 무얼, 태어난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나의 핏덩이가 엄마와 살이 분리되었다는 이유로 목이 쉬게 울어 젖힐 때면, 그 광경을 본 가깝거나 먼 가족들이 하는 말은 하나같이 “애가 우는데 엄마가” 떨어지지 말고 잘 안아 달래라는 거였다. 이제는 8킬로에 육박하는 나의 핏덩이가 어깨에 메는 포대기인 ‘아기띠’에 자리를 비집고 들어와 어깨에서 시작해 비로소 전신과 합체하여 엄마라는 사람의 용변도 함께 해결하려 든다. 이맘때 아이들에게는 영속성이라는 개념이 없다는데. 눈에 보이지 않으면 영 계속될 리 없는 엄마의 눈빛이 일 초도 안 되어 못 버티게 그리운 걸까. 그래서 나는 이 핏덩이를 매달고라도 집회에 나가고 싶었다. 태어나 들려준 적 없는 고함이 난무하는 그 현장에, 태어나 맞아본 적 없는 칼바람 속에도, 굳세게 숨겨 안고 있을 걱정만 한 것이다. 체온계를 다시 꺼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첫째 등하원길 매일 매일이 ‘진짜 겨울’이 되는 추위 갱신에, 특별히 더 매서울 바람의 여의도가 송출되는 화면을 끝도 없이 바라보았다. 제법 문장 구사가 원만해진 첫째는 며칠간 꺼지지 않는 뉴스를 가리키며 “무슨 아저씨야?” 하고 묻는다. 만 3세에게 어떤 대답이 적합할지 몰라 더듬더듬 말을 찾고 있는데, 대한민국이라는 말 하나에 홍채까지 끌어모아 반짝거리며 박수 다섯 번을 반복하여 치는 것이다. “대한민국 짝짝짝짝짝.” 내 딸이 아는 대한민국은 이런 것이리라. 아이의 턱 밑까지 뒤덮인 콧물을 닦아내며 내 처지에 시위는 무슨 시위냐며 또 한 번 고꾸라진 마음이 파랗거나 빨개진다. 살라며 어깻죽지를 잡아끌어다가 수덕사 등반길을 자초했던 엄마에겐 떨어져서 해방되고 싶다는 말이나 나불댔었는데 그 밑에 팔던 다래 순, 부지깽이, 햇고사리 같은 내 새끼 손뼉이 맞장구쳐지는 날이 오니 당장이라도 뛰어나가 무언가를 바꾸고 싶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내 가정을 지키느라 딱딱해지기도 한다. 작금의 참극들을 증상처럼 앓기만 하다가 은박 무덤을 밟고서게 될까 두렵고 애통한 마음으로 쓴다. 목도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내 아이들을 지키는 일 일테니까. 내 아이들을 지키는 일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될 테니까. 그러므로 내 나라를 지키는 눈이, 홍채가 되려 한다. 시리게 얼어버린 은박담요가 내 아이들의 새벽일지 모르니. 어린이병원을 향해 달리는 차 안에서 자장가가 되어버린 국회방송을 재생하며…, 박수 다섯 번이 따라붙는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국회로 뛰쳐나간 이들에게 진 빚으로 이 일기의 끝을 맺는다.

2024년 12월 21일. 일을 하다 말고 남태령으로 향했다. 트랙터를 끌고 상경한 전봉준 투쟁단이 경찰과 대치하고 있었다. 트랙터의 깨진 유리창. 경찰벽이 열리지 않을 거라 생각해 그곳으로 갔다. 수도방위사령부 건물 옆에서 시위대가 투쟁하고 있었다. 그곳에 이상하리 만큼 여자들이 많았는데. 그들이 추운 날씨에 잠들지 않기 위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있었다. 까만 밤 사이사이 고개를 내미는 폭력의 기시감을 발로 꾹꾹 누르고 있었다. 나는 그 장면이 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한 여자는 내게 방석을 주었고, 한 여자는 내게 동지 팥죽을 주었다. 한 여자는 핫팩을 주었고, 한 여자는 내가 손에 쥐고 있던 쓰레기를 가져갔다. 한 여자는 따듯한 물을 전해주고 발언대로 향했다. …여자에게, 여자가.

추위에 몸이 남아나지 않는 느낌이 들어 역 안으로 몸을 피했다. 역사 구석구석에 몸을 덥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앳된 여자가 몸을 구기고 잠들어 있었다. 작은 노트에는 빨간 글씨로 ‘투쟁!’이라고 적혀있었다. 나는 그녀의 손에 핫팩을 쥐어주었다. 단단했던 경찰벽이 열렸다. 동이 트고 사람들이 몰려 들어왔다. 그 일사분란함을 보고 어쩐지 마음이 어려웠는데. 움트기 직전의 고요함, 봄이 오기 전의 맹렬한 추위. 땅이 묵은 이야기를 들려주어서 그랬던 것 같다. 어디에선가 돌봄과 살리는 힘을 배워와, 발명해 그렇게 싸우는 여자들이 대단했다. 그 장면은 절대 잊거나 지울 수 없을 테고 그 밤은 그곳에 있었던 이들만이 알 수 있겠지. 봄은 그렇게 오나 보다, 하고.

광주에서 만난 여자가 그런 말을 했다. 왔다 갔다 하는 건 자전거와 오토바이, 리어카 뿐이었고, 아주머니들이 음식을 머리에 이고 계속 도청으로 날랐다고. 총을 쏘고 목숨이 위태로운 난리통에서 자유와 평화를 느꼈고, 우리가 바라던 대동세상이 온 게 아닌가 했다고. 자유를 느끼는 건,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과 울타리 바깥에 있는 사람의 차이라고 말이다. 나 역시 국회에서, 남태령에서, 한남동에서 그녀가 말하는 자유를 어렴풋이 느꼈다. 이 광장의 모습을 그녀에게 전하고 싶다. ‘혼자가 아니었어요.’ 1980년 5월 18일여자에게, 2024년 12월 3일여자가.

이 사진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뭇잎 아래의 당신, 문자를 읽는 눈에게 그 몫을 돌리고 싶다.

추신: 최승자는 나에게 편지를 써준 적 없지만, 내 세상은 그녀의 편지를 받았다.

'인간답게' 라는 가치 기준이, 진리가 자꾸 모호해져간다. 그래서 때로 한 10년쯤 누워만 있고 싶어질 때가 있다. 모든 생각도 보류하고 쉽게 꿈꾸는 죄도 벗어버리고 깊이깊이 한 시대를 잠들었으면. 그러나 언젠가 깨어나 다시 시작해야 할 때의 황량함. 아아 너무 늦게야 깨어났구나 하는 막심한 후회감이 나를 잠들지 못하게 한다. 결국 그 거대한 타의의 보이지 않는 폭력에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최소한 인간답게 죽을 수 있기 위해서는 대항하여 싸우는 필사의 길 밖에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밤에도 나는 이를 갈며 일어나 앉는다. 끝없이 던져지고 밀쳐지면서 다시 떠나야 하는 역마살의 청춘 속에서. 모든 것이 억울하고 헛되다는 생각의 끝에서, 내가 깨닫는 이 쓸쓸함의 고질적인 힘으로, 허무의 가장 독한 힘으로 일어나 앉는다.

잠들지 않고 싸울 것을, 이 한 시대의 배후에서 내리는 비의 폭력에 대항할 것을, 결심하고 또 결심한다. 독보다 빠르게 독보다 빛나게 싸울 것을. 내가 꿀 수 있는 마지막 하나의 꿈이라도 남을 때까지.

– 최승자,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중에서

카메라를 들어준 여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강모래, 김미카, 박규현, 심미섭, 이수연, 윤이람, 연혜원, 익명의 샤이니 팬, 전다정

  • 1 민주화기념사업회 한국여성운동구술기록 3차년도 사업 기록에는 그녀가 전남 지역의 노동조합의 ‘산파’ 역할을 했다고 적혀있다.
  • 2 광주여자기독교청년회.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광주YWCA 대의동회관에서 현수막, 대자보 제작, 모금, 취사 등의 활동을 펼쳤다.
  • 3 ‘완전하게’ 이야기하기가 불가능한 것을 ‘모든 것을 무릅쓰고’ 이야기하기. -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모든 것을 무릅쓴이미지』
  • 4 여자들에 부쳐. ‘정치적으로 나타나기, 이 민중들의 나타나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한나 아렌트는 얼굴, 다양성, 차이, 간극 등 네 개의 패러다임을 환기시키면서 다음과 같이 응답했다. 얼굴. 민중들은 추상이 아니다. 그들은 말하고 행동하는 몸으로 만들어진다. 그들은 자신의 얼굴을 제시하고 노출한다. 다양성. 물론 이 모든 것은 그 어떤 개념도 그것을 종합할 수는 없는 유일성-유일한 운동, 유일한 욕망, 유일한 발화, 유일한 행위-로 이루어진 무한한 군중을 만든다.’ -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민중들의 이미지』
  • 황예지

    사진가이자 작가인 황예지는 요리, 보살핌, 고백, 기록과 같은 여성적 제스처를 저항의 도구로 재위치시킨다. 그의 작업 은 이미지와 텍스트, 음식과 아카이브의 교차점에서 전개되며, 사적인 행위와 기 록적 형식을 엮어 새로운 목격과 연대의 방식을 제안한다. ‘광장’에 시선을 두고, 돌봄이 저항으로, 기억이 공동의 것으로 전환되는 미묘한 과정을 가시화한다.

연락처
제61회 베니스비엔날레 국제미술전 한국관
관람자 정보
전시 기간: 2026년 5월 9일 – 11월 22일
관람 시간: 10:00 – 18:00